2020. 11. 19. 09:08ㆍ영화
김혜수가 나오는 영화다.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모르나 어느날 증인 보호 프로그램으로 섬에 있던 세진(노정의)이 자살을 선택한다. 태풍이 많이 불던 날 벼랑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잠시 쉬고 있던 현수(김혜수)는 복귀 전에 자살 사건을 맡기도 한다. 섬으로 떠난 현수는 그곳에서 진짜로 자살이 맞는지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탐문조사를 벌인다. 섬 사람들은 순박하고 세진을 보긴 했으나 일부러 모른 척 하며 지켜보는 정도였던 덧하다.
세진은 밀수사건으로 잡힌 아빠 때문에 섬으로 왔었고 형준(이상엽)형사가 유독 친하게 지내며 챙겨줬다. 세진이 머물던 곳은 원래 순천댁(이정은) 오빠가 살던 곳으로 현재 공실이라 빌려줬다. 순천댁은 농약이 잘못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가볍게 세진이 자살한 장소 등을 보며 처리할 것이라 위에서는 복귀 전에 조사를 시켰던 것이다. 혹시나 다른 일이 있을까봐. 막상 현수가 조사를 시작하자 석연치 않은 일이 많아지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뭔가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무엇보다 현수는 잠시 휴직했던 것이 교통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마음 고생을 하고 남편과 이혼을 앞둔 상황이라 여러모로 심신이 고달파 한 쪽 손이 마비가 왔었다. 영화는 이런 내용으로 전개되면서 타이틀 제목처럼 나를 만난다는 이야기다. 현수는 세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되는 일도 없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믿었던 체계가 무너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없어 힘들고 버겁고 삶의 의욕마저 사라졌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고자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살고자 했다. 남들이 볼 때는 이상하고 피하고 싶었을지라도 현수는 살고싶었다. 그 과정에서 세진을 알게 되었다. 세진을 하나씩 조사하면서 도저히 자살했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CCTV에 비친 세진은 이 상황이 답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뿐 의욕을 갖고 있었다. 상황에 순응하기보다는 벗어나려는 의도를 갖고 생활했다.
그런 모습을 보게된 현수는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세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알게 된다. 세진에게 벌어진 것도 똑같았다. 세진이 어찌할 수 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다녔고 아이들을 만나고 딱히 고민이라고 할 것은 그다지 없는 생활이었다. 어느날 벌어진 사건에 자신이 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피해야했다. 왜 피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경찰이 섬으로 가 있으라고 하니 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 세진을 보면서 현수는 나를 봤다고 해야 한다. 영화는 여기에 순천댁이 중간에 역할을 한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대화에 현수는 상처를 받는다. 그들은 제대로 된 상황이나 인식도 없이 그저 보이는 걸 근거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말은 귀가 있으면 듣게 된다. 듣기 싫어도 듣게 된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그 독을 먹으면 말이 막히고 심신이 가라앉는다.
주변 사람들은 현수에게 비난을 하거나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어줍지않은 충고를 한다. 현수를 아는 사람들은 친분에 따라 대하는 행동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 말없이 그저 바라보고 옆에 있는 것이 가장 최고일 수 있다. 순천댁은 말하고 싶어도 말 할수 없다. 오히려 정제되고 엄선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라는 것도 입으로 낼 수 없으니 글로 써서 의사표현을 한다. 글자도 제대로 쓰기 힘들기에 더욱 아끼고 아껴서 전달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현수다. 그렇기에 현수의 관점에서 진행되고 모든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다보니 세진은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고 모든 것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도 타자로 머물게 된다. 그 부분이 좀 아쉬웠다. 사건의 중심인 세진의 관점에서 영화가 진행되었으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영화가 아닌 소설이었다면 현수가 아닌 세진의 관점으로 사건이 진행되었을 듯하다. 그랬다면 좀 더 내밀하고 섬세한 심리묘사가 영화에서 나오지 않았을까한다.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 제목은 어떻게 보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내가 죽은 날'도 아니고 '죽었다'는 더더욱 아니다. 죽던 날에 많은 것이 변한다. 많은 작품에서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많다. 누구나 새로운 삶을 꿈꿔본다. 소설 <빅피처>같은 경우에 대표적인 소설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을 먹어도 주변 사람들이 여전히 똑같다면 나혼자 변한다고 달라질 것은 거의 없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 맞다.
아마도 현수는 그렇기에 자신이 변하려고 노력을 해도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좌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복귀를 해도 변한 것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누구나 가슴속에 몇 가지 비밀이나 말하지 못할 것을 간직한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오로지 본인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누군가 나를 탐문조사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드러나게 될까. 그렇게 드러난 나는 진정한 나일까,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던 나일까. 답은 모르겠다. 살아가고 있는 나는 계속 살아간다는 건 확실하다.
핑크팬더의 결정적 한 장면 : 현수가 순천댁에게 우편 공책 돌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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