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4. 09:00ㆍ영화
과거에 상고라고 있었다. 상업고등학교다. 남녀가 함께 다니기도 했지만 주로 여성이 가는 학교로 인식이 되었다. 당시에는 대학교를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다. 이 중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중3은 시험을 쳐서 상업고등학교로 들어갔다. 졸업후에 대기업이나 은행 등으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상고는 어지간한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훨씬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이런 곳을 나온 후에 곧장 취직한 친구들은 승진이 좀 더 빨랐다.
대학교를 갔다 오지 않았으니 근무경력이 나이에 비해 빠르니 승진이 잘 되었다. 문제는 일정 수준 이후부터는 한계가 명확했다. 내가 알고 있던 친구들이나 선배들도 초반에 승진이 상대적으로 빨랐지만 보이지 않는 천장이 있어 그걸 뚫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중도에 그만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딱히 상고라는 명칭보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고등학교가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당시는 지금와서보면 모든 것이 좋았다.
고용은 안정되어 있었다. 한 번 취직한 회사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아무 걱정없이 일할수 있었다. 회사는 지금과 달리 평생 직장으로 내 모든것을 받쳐 생활하는 곳이라 여겼다. 한국도 무엇을 하든지 잘 되기만 한다는 확신이 있었던 시기였다. 지금와서 보면 다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도 당시는 별 의식없이 잘만 살았다. 기대와 희망은 물론이고 누구나 큰 어려움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던 시대였다. 영화는 삼진그룹이 배경이다.
이곳에서 상고를 나와 곧장 취직한 여사원들은 주로 하는 일이 오전에는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타 사원들에게 주는 업무다. 그 외에도 잡다한 모든 일을 했다. 주요 일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없다면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역할이었다. 남들과 달리 회사복을 입고 있어 금방 티가 나기도 했다. 평사원으로 오래 근무했어도 직급이 올라가지 않아 토익 시험을 잘 치면 대리로 갈 수 있는 자격조건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회사에서는 토익시험을 위한 공부를 단체로 했다.
자신보다 늦게 입사했어도 대학을 나왔기에 어느덧 대리가 된 후배를 보면서 대리가 되겠다는 굳은 각오로 공부를 했다. 여기까지 영화는 무척이나 생기발랄하고 유쾌하게 흐른다.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는 서로 동기로 각자 자신의 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있다. 전부 능력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요한 업무에 배제되고 회의에 참여도 못하기에 토익시험을 쳐서 대리가 되려고 한다.
이자영은 우연히 공장에 갔다 페놀을 하천으로 내보내는 걸 알게 되었다. 이를 무마하는 회사와 밝히려는 삼총사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된 뼈대다. 배경이 90년대라서 괜히 친숙한 느낌이 있다. 한국에서 수많은 시대가 있지만 누가 뭐래도 리즈시절은 90년대다.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는 10년이었다. 그 이전에는 고도성장을 했지만 그 과실을 다같이 나눠 먹었다는 느낌은 없었다. 90년대에는 물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주택가격도 크게 상승하지도 않았다.
이와 함께 다들 안정된 직장에서 고용으로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 이후에 평생 직장은 사라졌고 각자도생이 화두가 되었다. 최근에 많은 곳에서 과거를 돌아 볼 때 대부분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정이 넘치고 활력과 활기는 곳곳에 이어졌다. 대신에 잘 못한 걸 잘못했다고 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 영화에도 역시나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한다. 결혼해서 아이로 인해 퇴사를 하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없이 회사를 다닐 수 있다.
이자영이 자신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기도 하다. 다들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회사를 위해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다닌 사람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의 가치가 우선이었고 개인의 개성은 다소 낮게 봤다. 이런 상황에서 평생 직장을 짤릴 수도 있는데도 잘못한 걸 팧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그저 상고나온 허드렛일이나 한다고 생각되었던 여사원들이 자신이 갖고 있던 능력을 마음것 발휘한다. 회사에서 먹은 짭밥만 해도 만만치 않다.
영화가 중후반부로 가면 무척 유치한 느낌이 강하다. 집단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고 떠들고 다함께 뭔가를 하려 노력한다. 여기에 악인을 상대로 의기투합해서 함께 똘똘 뭉치는 장면이 무척이나 촌스러웠다. 보면서 '뭐.. 이렇게 촌스러워!!'했다. 재미있게도 그 촌스러운게 바로 이 영화에서는 미덕으로 다가왔다. 배경이 90년대로 그런지 몰라도 그게 자연스러웠다. 세련되지 못하고 무엇인가 다함께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시대를 오히려 정확히 보여준다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면 그래도 반전의 반전이 있다.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편인 착각이 들었다. 그 놈도 나쁜 놈이다. 착한 놈인것처럼 보이는 놈은 솔직히 눈치 채게 된다. 마지막에 가서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발휘하던 실력을 다함께 풀어내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진짜 내용이 아닐까한다. 영화 처음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밝힌다. 출연진도 캐릭터에 맞게 잘 캐스팅을 해서 보는 재미도 있었다. 현재 이분들의 나이가 50대 중반이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핑크팬더의 결정적 한 장면 : 모든 여직원이 다함께 서류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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