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 - 남은 자들

2022. 5. 15. 20:03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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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도대체 무엇때문에 저러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게 만들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어느 교회에서 집사가 뭔가 분주하다. 예배당에서 아이는 피아노를 어느 할아버지에게 배우고 있다. 딩동딩동하며 연습 중에 있다. 집사는 교회 2층인 듯한 한 방에 세팅을 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탁자를 사무실 정 중앙에 반드시 놓는 것은 시작이다. 그 후에 주변도 아주 깔끔하게 해 놓는다. 뭔가 눈에 거슬리는 것이 될 만 한 것은 전부 치워버린다.

각티슈를 탁자 정 중앙에 놓으려고 하니 그건 좀 안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나 신경을 쓰고 조심스러워 하는지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폭발할 정도였다. 영화 내내 거의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중년 커플이 나오면서 차에서 살짝 심리적으로 흔들리며 마음을 다잡고 교회로 들어선다. 잠시 후 다른 중년 커플이 들어온다. 탁자의 의자배치까지도 엄청나게 신경썼던 바로 그 탁자에 두 커플이 앉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작 이를 준비했던 집사나 자리를 마련한 인물은 퇴장을 한다. 두 커플이 서로 마주보며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커플이 이야기를 할 때도 초반 10분이 넘게 무엇때문에 저런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로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다소 빙빙 돌려가며 중심을 빼놓고 이야기한다. 서로가 그 이야기를 피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겉도는 느낌이다. 자신은 모든 것에 대해 소송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 남자가 한다. 부인도 역시나 똑같다는 언급을 한다.

점차적으로 두 커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초반에는 굳이 저 사람들은 왜 만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뭔가 서로 인연이 있지만 서로 악연인 듯한 느낌이었다. 서로 각자 자신들이 아닌 아이들 문제인 듯 했다. 서로의 아이들이 뭔가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만든다. 한국처럼 왕따 문제나 학교폭력 문제로 서로가 만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총이 있으니 총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지에 대한 추측과 함께 서로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미국은 총격 사건이 자주 벌어진다. 한국에도 뉴스가 나올 정도로 학교 내에서도 총격 사건이 난다. 총을 들고 학교에 난입해서 무차별적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총을 난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희생당한다. 그들이 희생 당한 이유는 없다. 총을 쏜 아이가 왕따시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불만이나 심리적 불안을 그런 식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낼 뿐이다. 이런 일이 미국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한다.

영화 <매스>는 바로 그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가 만나 나누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긴 했지만 둘 다 현재는 세상에 없다. 희생자와 가해자로 나눠지는 것은 당사자들일 뿐이고 여기는 그들의 부모다. 뜻하지 않게 가해자의 부모가 되었지만 똑같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피해자와 희생자가 되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둘 다 똑같이 자녀를 잃은 부모다. 결과는 똑같지만 그 현상과 과정은 천지차이로 완전히 다른 경험과 마음을 현재 갖고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4명의 이야기로만 구성된다. 감정을 고조시키는 음악도 나오지 않는다. 인서트를 통해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실제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4명의 하는 대화로 모든 것을 전부 보고 들으면서 상상하고 공감해야 한다. 연극처럼 영화가 진행되기에 연기자의 연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이 진짜 생존하지 못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연기하지 않으면 관객은 공감하기 힘들다. 사람에게 상상이란 얼마나 대단한지를 영화를 보며 느끼게 된다.

분명히 4명의 배우가 전부 그런 끔찍한 일을 겪어보지 못했을텐데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함께 호흡하게 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내가 다소 이상한 것인지 작품에서 좀 더 그쪽으로 방점을 찍은 것인지 모르겠다. 희생자보다는 가해자의 부모에게 좀 더 심정적으로 공감되고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 집에서 하는 행동이 사춘기가 되면 전체에서 10%가 아닐수도 있다는 걸 부모는 모른다.

가해자 부모로 모든 짐을 짊어져야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모가 한 행동은 아니다. 자신이 잘 못 키웠다는 죄책감과 원망과 사회에서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이는 감당해야 하고 짋어져야 할 무게다. 손가락질 하긴 쉽지만 부모라고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자녀의 내면까지 전부 알아서 미리 미리 행동하고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확률상 좀 더 바르게 키울 가능성이 커질 뿐이다. 희생자의 부모 입장에서는 자신의 짐을 덜어줄 누군가 필요할 것이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가해자 부모.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생각이 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가해자 부모는 어디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모든 걸 품고 살 수밖에 없다. 희생자 부모는 마음것 목놓아 울거나 외칠 수도 있겠지만. 떠난 자가 아닌 남은 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작품에서도 그 과정을 그릴 뿐 남은 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더욱 애절하고 아프고 보는내내 더 집중하며 관람하게 되는 영화다.

시사회로 봤습니다.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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