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6. 14:37ㆍ드라마

축소 지향의 사회 일본, 그들이 그려내는 영웅의 모습 흔히 일본을 가리켜 '축소 지향적인 사회'라고들 합니다. 인구 1억 2천만 명이 넘는 경제 대국이자 문화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소박하고 정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적인 경제 침체와 저성장 기조가 이어지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의 삶과 안녕에 집중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졌습니다. 과거 일본 대중문화가 '우주전함 야마토'나 '건담'처럼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세계를 구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에 열광했다면, 지금은 '나의 작은 행복', '소소한 일상'이 더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콘텐츠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이제는 지구를 지키는 슈퍼히어로보다는 내 옆집에 살 것 같은 소시민적 영웅들이 사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권 없는 나라, 안으로 파고드는 시선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일본 국민 중 여권을 소지한 비율이 20%대 미만(실제 통계 반영 시 더 낮음, 유저 정보인 50% 미만 참조)으로 떨어졌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립니다. 이는 단순히 해외여행을 안 간다는 의미를 넘어, 외부 세계로의 확장이 아닌 내부에서의 안정을 추구하는 일본인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예전처럼 전 세계를 무대로, 혹은 우주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줄어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밖으로 뻗어나가는 에너지가 줄어든 대신, 그 에너지는 고스란히 개인의 내면과 아주 사소한 일상으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 드라마들은 "세상을 바꾸자"라고 외치기보다는 "오늘 하루 별일 없이 살자"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거창한 정의 구현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평온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시대,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지구는 됐고, 내 코가 석 자" 현실 밀착형 초능력자들 보통 '초능력'이라고 하면 마블이나 DC 코믹스의 히어로들처럼 하늘을 날고, 시간을 되돌리며, 엄청난 완력으로 빌런을 때려잡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감성은 다릅니다. 능력이 생겨도 굳이 그걸로 지구를 지킬 생각도 없거니와, 딱히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올 초 방영된 일본 드라마 <핫스팟>에서도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지구 정복은커녕 일본 사회에 정착해 일반인들과 섞여 살며 생계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튀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능력을 쓰더라도 아주 소소한 문제 해결에 그치는 모습. 이것이 바로 현재 일본이 정의하는 '리얼한 판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 그 흐름의 정점에 있는 드라마 <조금만 초능력자(원제: 소시민 등)>가 아사히 TV를 통해 우리 곁을 찾아왔습니다.

아사히 TV의 야심작, 결핍이 만들어낸 능력 이번에 소개할 드라마 <조금만 초능력자>는 제목에서부터 그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미국 드라마 속 히어로들처럼 완벽한 피지컬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인물이 초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어딘가 하나씩 나사가 빠진 듯한 부족한 인물들이 뜻밖의 계기로 초능력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룹니다. 이들은 선천적인 능력자도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회사에서 제공하는 약을 먹어야만 일시적으로 초능력을 쓸 수 있는데, 그 능력의 실체라는 것이 참으로 하찮고 귀엽기까지 합니다. 거창한 변신 장면도, 화려한 CG도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는 묘한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조금 특별한 이야기, 이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 매력입니다.

날지 못하는 슈퍼맨, 마음을 읽는 백수 아저씨 드라마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의 면면을 보면 실소가 터져 나옵니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시간을 되돌리지도 못합니다. 기껏해야 시든 꽃을 다시 피게 하거나, 지나가는 강아지와 "배고프니?" 정도의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주인공인 오오이즈미 요가 연기한 '분타'의 능력이 개중에는 가장 쓸모 있어 보입니다. 타인의 신체에 손을 접촉하면 그 사람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 같은 능력이죠. 오오이즈미 요 특유의 쭈글쭈글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연기 톤은 별 볼 일 없는 중년 남성 분타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대단한 능력이 아님에도 그 능력을 쓰며 쩔쩔매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짠한 웃음을 유발합니다.

해고 통보와 기묘한 취업, 그리고 금지된 사랑 주인공 분타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 있습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그에게 어느 날 '노나마레'라는 정체불명의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간 면접장에서 분타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과감하게 할 말을 다 쏟아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마음에 들어 합격하게 됩니다. 회사는 그에게 초능력을 발현시키는 약과 함께 살 집을 제공하며 활동을 지시하는데요. 여기서 가장 황당하면서도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바로 "절대로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능력자로서의 활동과 사랑이 무슨 상관이길래 이런 조건을 건 것일까요? 이 생뚱맞은 조건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복선이자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가짜 남편과 진짜 같은 아내, 미야자키 아오이의 존재감 회사가 제공한 주택에는 또 한 명의 입주자가 있습니다. 바로 미야자키 아오이가 연기하는 '시키'입니다. 분타는 처음에 시키가 회사에서 설정해 준 '가짜 아내' 혹은 함께 미션을 수행하는 동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키는 초능력자도 아니고, 회사의 직원도 아닙니다. 그녀는 분타를 자신의 죽은 '진짜 남편'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기억과 인지에 문제가 있는 인물입니다. 실제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세계 속에서 분타는 살아 돌아온 남편인 것이죠. 졸지에 남의 남편 노릇을 하게 된 분타, 그리고 해맑게 그를 반기는 시키. 사랑하면 안 된다는 회사의 규칙과, 너무나 사랑스러운 가짜 아내 사이에서 분타는 끊임없이 흔들리게 됩니다.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미야자키 아오이의 사랑스러운 연기는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세상을 구하는 방법: 늦잠 깨우기와 우산 챙겨주기 분타에게 스마트폰을 통해 내려오는 회사의 지령은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구를 침공한 괴수를 물리쳐라" 같은 미션이 아닙니다. 첫날 받은 미션은 늦잠을 자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을 깨워 정각에 출근하게 만드는 것, 화창한 날씨에 굳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들고 나가게 만드는 것, 카페에 앉아 있는 남자의 핸드폰 배터리를 방전시키는 것 등입니다. 도대체 이런 사소한 장난 같은 일들이 초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분타도, 시청자도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러한 사소한 행동들이 나비효과처럼 번져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큰 사고를 막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늦잠을 깨워 정시에 출근한 덕분에 교통사고를 피하고, 우산을 챙긴 덕분에 소나기 속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식이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소시민들의 팀플레이 "당신이 한 그 사소한 일이 사실은 세상을 구한 것입니다." 회사는 분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분타는 혼자라고 생각했던 미션 수행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을 도와주던 사람들이 사실은 같은 회사 소속의 동료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각자 보잘것없는 초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들이 하나로 모여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때 거대한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팀을 이루어 회사에서 내려오는 엉뚱한 지령들을 수행해 나갑니다.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듯하지만, 결국 그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셈입니다. 가장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는 기적, 그것이 이들이 보여주는 팀플레이의 정수입니다.

일주일의 유효기간, 넷플릭스에서 만나는 소소한 힐링 이들의 초능력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약 한 번을 복용하면 딱 일주일 동안만 능력이 유지됩니다. 즉,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회사의 지시를 따르고 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죠. 이는 마치 월급을 받기 위해 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비애를 은유하는 듯해 씁쓸하면서도 공감이 갑니다. 드라마는 총 9부작으로 일본 현지에서는 최근 종영되었으며, 무언가 숨겨진 거대한 비밀과 각 인물의 사연이 얽히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넷플릭스와 채널J를 통해 시청할 수 있습니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에 지쳤다면, 엉뚱하지만 따뜻하고, 하찮지만 사랑스러운 이 소시민 초능력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은근히, 아니 꽤 깊이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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