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전투가 이어지는 미국, 그 혼돈의 기록: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 10. 2. 14:09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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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때때로 스크린 너머 연출가의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배우의 연기, 카메라의 움직임, 이야기의 흐름 등 모든 요소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이는 결코 평범한 감독의 솜씨가 아님을 직감하게 만든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낯익은 듯하면서도 묵직한 연출력에 감독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 역시나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과거 <리노의 도박사>,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 등을 통해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관계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던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 영화가 지닌 깊이의 근원을 짐작하게 했다.

사실 최근 그의 작품들을 놓치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이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감독의 철학과 고뇌가 깊이 담긴 결과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제작사 역시 나처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스타 배우의 이름값에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 또한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오직 디카프리오의 출연 소식 하나만으로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다소 긴 영화의 제목은 언뜻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One Battle After Another', 직역하자면 '하나의 전투 후에 또 다른 전투'라는 의미로, 이는 단순히 영화 속 인물들의 투쟁을 넘어, 끝없이 이어지는 현대 미국의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암시하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영화의 서사는 196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활동했던 급진 좌파 단체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테러 단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화면에 등장하는 숀 펜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관객을 압도하며 극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개인적으로 숀 펜은 그의 뛰어난 연기력에 비해 다소 과소평가받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역할을 맡든 스크린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계산된 연기를 넘어선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폭발시키며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숀 펜이 연기한 '스티븐 록조'는 영화의 핵심적인 악역이지만, 단순한 악인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인 인물이다. 그는 테러 단체를 쫓는 인물이면서도, 그 단체의 수장인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 분)에게 기묘한 매혹과 사모의 감정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프렌치 75'라는 이름의 테러 단체를 이끄는 퍼피디아는 현장에서 직접 행동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다. 멕시코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들을 구출하는 작전 현장에서 스티븐과 처음 마주친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노골적인 성적 행동을 요구하며 상황을 즐기는 듯한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위험하고 매혹적인 리더 퍼피디아에게는 연인이자 조력자가 있다. 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밥 퍼거슨'이다. 그는 폭탄 제조 전문가로, 어떤 확고한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 조직에 합류했다기보다는, 퍼피디아라는 인물 자체에 깊이 매료되어 그녀를 돕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다. 퍼피디아는 엄마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더욱 극단적이고 과격한 테러 활동에 몰두하게 되고, 이는 결국 조직의 와해를 불러온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 밥 퍼거슨은 남은 조직의 도움을 받아 신분을 세탁하고, 어린 딸과 함께 세상의 눈을 피해 깊은 잠적에 들어간다.

그렇게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다. 밥 퍼거슨은 '윌라 퍼거슨'(체이스 인피니티 분)이라는 이름으로 자란 딸과 함께, 세상과 단절된 채 철저히 숨어 지낸다. 이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휴대전화조차 사용하지 않으며 은둔 생활을 이어간다. 이 영화의 원작은 토머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로, 이민자들의 삶과 정체성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민자 문제, 인종 갈등과 기묘하게 맞물리며 마치 예언과도 같은 서사를 펼쳐 보인다는 것이다.

과거 테러 단체를 쫓던 스티븐 록조 대령은 16년의 세월 동안 더욱 강력한 권력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는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 사상에 심취한 세력에게 포섭되어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으로 활동한다. 이들은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위험한 신념을 바탕으로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에게 극도의 배타성을 드러낸다. 심지어 미국에서 태어난 순혈 백인만이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극단적인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아마도 그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순혈은 앵글로색슨족뿐일 것이라는 섬뜩한 인상을 준다.

권력의 정점에 선 스티븐은 미국 내에 숨어든 불법 이민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놓쳤던 밥 퍼거슨 부녀의 흔적을 다시 발견하고 끈질긴 추적을 시작한다. 그의 집착은 단순한 임무 수행을 넘어, 마치 밥을 향한 개인적인 복수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토록 밥에게 집착했던 이유와 함께, 과거의 사건 속에 숨겨져 있던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며 또 다른 반전을 선사한다. 이 과정에서 윌라의 가라데 사범이자, 불법 이민자들을 몰래 돕는 조력자인 '세르히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니시오 델 토로 분)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영화는 현재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스크린 위에 펼쳐 놓으며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결코 섣불리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거나,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며 올바름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영화는 시종일관 딸 윌라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 밥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각자의 여정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미국 사회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관객은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현재 미국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결국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각 인물들이 겪는 개인적인 투쟁을 통해 미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본래 이민자들이 세운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분열과 갈등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어쩌면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을 통해 단순히 영화 속 서사를 넘어, 끝없이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는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되는' 미국의 현실 그 자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이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대중적 인기는 한 점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에만 몰두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경지에 오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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