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 없다>, 작품성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다

2025. 9. 25. 14:40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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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언제나 관객에게 지적인 도전과 미학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영화들은 정교하게 계산된 미장센과 복잡한 서사, 묵직한 주제 의식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아왔지만, 때로는 그 무게감 때문에 대중적인 '재미'와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작 <어쩔수가 없다>는 이러한 통념을 유쾌하게 깨부순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날카로운 연출력과 사회 비판적 시선은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시종일관 관객을 폭소하게 만드는 블랙 코미디의 매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감독의 기존 작품들을 진지한 자세로 감상해왔던 팬이라면, 이번 작품에서는 큰 소리로 웃으며 스크린에 빠져드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영화의 성공은 박찬욱 감독이 구축한 견고한 뼈대 위에서 배우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감독은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막다른 길로 몰아가는지에 대한 비판적인 서사를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처절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생존 분투를 위한 최적의 무대를 마련했다. 마치 잘 짜인 놀이터 위에서 배우들이 각자의 개성과 연기력을 폭발시키며 방방 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병헌, 이성민, 엄혜란, 손예진 등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배우들은 마치 연기 경연을 펼치듯 각자의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하여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연기 구멍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는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배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배우의 호연이 빛을 발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는 '만수' 역을 연기한 이병헌이다. 현시점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그의 연기력에 필적할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병헌의 가장 큰 강점은 스크린 속에서 '배우 이병헌'을 완벽하게 지우고 오직 캐릭터 그 자체로 관객과 마주한다는 점이다. 그는 수십 년간 제지 공장 외길 인생을 걸어오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전문성으로 똘똘 뭉친 장인, '만수'라는 인물을 섬세한 표정과 말투,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 녹여내며 살아 숨 쉬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병헌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밀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중년 가장 만수의 불안과 절박함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만수는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상장까지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자동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변화 앞에 속수무책으로 해고당한다. 그의 비극은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제지 기술이라는 한 우물만 파 온 그에게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의 전문성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사회에서 그는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좁디좁은 업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몇 안 되는 경쟁자들만 사라지면 된다는 뒤틀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지극히 비논리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평생의 자부심이 무너진 개인이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심리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의 위험한 생각에 불을 지핀 것은 아내 '미리'(손예진 분)가 무심코 던진 농담 한마디였다. 절망에 빠진 남편을 위로하려던 "그 사람들 다 없애버리면 되잖아"라는 말이, 세상을 흑백논리로밖에 볼 수 없게 된 만수에게는 하나의 '계시'처럼 다가온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는 본격적인 블랙 코미디의 궤도에 오른다. 만수는 자신의 뒤틀린 생존 논리를 실현하기 위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의 모습은 처절하고 비극적이지만, 지극히 평범했던 한 가장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을 유발하며 서스펜스를 고조시킨다.

만수의 계획은 어설프면서도 치밀하다. 그는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만 보는 전문 잡지에 구인 공고를 내어 자신의 경쟁자들을 파악한다. 입사 지원서를 통해 현재 실직 상태이면서 자신보다 뛰어난 경력을 가진 이들을 추려내고, 동시에 몇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직자들까지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 한때는 번듯한 집을 장만하고, 분재를 가꾸는 소소한 취미를 즐기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그의 과거 모습은 현재의 처참한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성실하게 살아온 한 개인의 삶이 고용 불안이라는 사회적 문제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지를 영화는 냉정하게 보여준다.

안정적인 직장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아래 다소 무리해서 얻었던 모든 것들은 실직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해 정든 집을 빼앗기고,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이제 만수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아니 빼앗긴 삶을 되찾기 위해 한 명씩 경쟁자를 '제거'해 나가는 길에 들어선다.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바로 이 처절하고도 황당한 '취업 분투기'이며, 그 첫 번째 목표물이 바로 이성민이 연기한 '범모'다.

범모는 만수와 마찬가지로 실직 후 술로 세월을 보내며 무기력하게 지내는 인물이다. 그의 아내 '아라'(엄혜란 분)는 친정의 재력에 기대어 배우의 꿈을 좇는 철없는 인물로, 이들 부부의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사회 부적응을 보여준다. 만수가 각고의 노력 끝에 범모를 제거하려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에 나선 인물의 필사적인 몸부림과 어설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상황들은 관객의 허를 찌르는 웃음을 자아낸다. 배우들의 과장된 듯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연기는 이 장면의 코믹한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장면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박찬욱 감독의 전매특허인 탁월한 선곡 감각이다. 범모와 만수가 사투를 벌이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조용필의 흥겨운 노래가 배경에 흐르며 기괴한 조화를 이룬다. 박찬욱 감독은 매 작품에서 한국의 옛 가요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장면에 독특한 정서와 리듬감을 부여해왔다. 이러한 연출이 한국 관객에게는 향수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한국 대중가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해외 관객들에게는 과연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병헌, 이성민, 엄혜란 세 배우가 서로의 속내를 감춘 채 눈치를 보며 벌이는 필사적인 생존 게임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물론 영화가 시종일관 가벼운 웃음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범모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코미디의 정점을 찍은 후, 영화는 점차 본래의 묵직한 주제 의식으로 회귀한다. 거짓말처럼 웃음이 터져 나오던 순간이 지나가면, 관객은 만수가 처한 현실의 냉혹함과 그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렸다는 사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듯, 표면적인 재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만 결국 시스템의 거대한 톱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의 비극은 웃음 끝에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는 바로 만수를 괴롭히는 '어금니'다. 실직 이후 시작된 그의 지긋지긋한 치통은 그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는 치과에 가서 근본적인 치료를 받을 생각 대신, 고통의 원인인 어금니를 스스로 뽑아버리는 극단적인 해결책을 택한다. 이는 자신의 재취업을 가로막는 경쟁자들을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그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은유다. 기존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다소 현학적인 상징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어쩔수가 없다>는 이처럼 직설적이고 알기 쉬운 상징을 통해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꾀한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인간의 노동력이 로봇과 AI로 대체되는 미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가 내내 유지해왔던 세련된 은유와 블랙 코미디의 톤과 달리,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교훈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섣부른 징벌을 내리는 식의 안일한 권선징악 구조를 탈피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비극으로 치환시키는 현실을 끝까지 밀어붙인 점은 박찬욱 감독다운 대담한 선택이었다. 감독이 이 작품을 10년 넘게 구상하고 품어왔다는 후문처럼, <어쩔수가 없다>는 깊은 고민과 통찰, 그리고 대중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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