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후: 철학적 시도와 서사적 분절 사이의 괴리
2002년,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는 좀비 장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감염자'들의 압도적인 속도와 공격성은 기존의 느릿한 좀비를 대체하며 장르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28일 후'는 하나의 장르를 창시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좀비물은 수많은 작품을 통해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지만, 한편으로는 클리셰의 반복으로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거장 대니 보일이 '28년 후'로의 귀환을 알리며 팬들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과연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이 흐른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인류와 감염자들의 생존 방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28일 후'와 마찬가지로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영국입니다. 2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영국의 생존자들은 여전히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중에서도 밀물과 썰물에 따라 육지와의 유일한 통로가 열리고 닫히는 신비로운 섬을 주된 무대로 삼습니다.
섬 주민들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동체를 이루어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썰물 때에만 제한적으로 육지로 나가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해오는 방식으로 연명합니다. 이들에게 육지는 생존의 기회이자 동시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미지의 공간입니다. 공동체의 규칙은 엄격하며, 정해진 나이가 된 아이들은 생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어른들과 함께 육지로 나가 감염자 사냥과 물품 확보 훈련을 받습니다.
이야기는 이제 막 12살이 된 소년 '스파이크'가 아버지와 함께 첫 번째 육지 탐사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아직 미숙하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슬로운'이라 불리는 일반 감염자를 사냥하는 데 성공하며 담력을 키워나갑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훨씬 더 강력하고 지능적인 '알파' 감염자의 습격을 받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섬으로 귀환합니다.
한편, 스파이크의 어머니는 원인 모를 병으로 침대에서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고 있지만, 고립된 섬에는 그녀를 치료할 약도, 의사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육지 탐사 중 우연히 '의사'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 스파이크는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어머니와 함께 섬을 몰래 빠져나가는 위험한 여정을 감행합니다. 이 여정을 기점으로 영화는 섬에서의 생존기와 육지에서의 사투라는 두 개의 큰 축으로 전개됩니다.
'28년 후'는 진화한 감염자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공포를 제시합니다. 28년이라는 세월은 감염자들에게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본능적인 파괴 욕구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섭취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는 에너지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지구의 근원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알파'로 명명된 변종 감염자는 놀라울 정도의 신체 능력과 지성을 겸비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알파 감염자가 기차의 손잡이를 직접 돌려 문을 여는 대목인데, 이는 단순한 본능을 넘어선 문제 해결 능력을 갖췄음을 시사하며 관객에게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이는 기존 좀비 장르의 문법을 뒤엎는 설정으로, '과연 이들을 단순한 감염자로 치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흥미로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반적으로 구성과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의문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비롯됩니다. 분노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그 날, 한 신부가 이를 심판의 날이라 외치며 기뻐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는 한 남자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건네주는데, 이 장면은 마치 그 십자가와 남자가 영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줍니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이 십자가와 남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 초반의 강렬했던 장면이 서사 전체에서 겉도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감염자가 출산하는 장면처럼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이 삽입되어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관객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단순히 충격적인 이미지를 위한 장치인지, 혹은 더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여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인공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 역시 많은 관객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토록 처절한 여정을 이어왔던 그녀의 최종 결정은 캐릭터의 동기와 행동의 개연성을 납득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영화는 단순한 생존 스릴러를 넘어 인간성, 종교, 구원과 같은 철학적인 주제를 담아내려는 야심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오히려 각각의 에피소드와 설정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결과물을 낳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28년 후'가 3부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서사적 공백과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들이 후속작을 위한 포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서 '28년 후'는 철학과 상관없이 수긍하기 어려운 장면과 설정이 많아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대니 보일의 귀환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의 야심 찬 시도가 과연 성공적인 3부작의 서막이 될지, 혹은 난해한 시도로 기억될지는 남은 두 편의 영화에 달려있을 것입니다.